열반

단상 / / 2025. 6. 14. 08:49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얼마 전 그를 가장 가까이서 모셔온 제자 안난다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남겼습니다.


세존께서도 열반으로 윤회하여 다시 저희 곁으로 돌아오십니까? 


그러자 석가모니가 말했다. 


안난다야
너의 질문은 겉보기엔 명료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착각이 담겨 있다. 윤회가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열반하면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순간 너는 마치 변하지 않는 나라는게 실제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 착각부터 풀어야 한다. 


불이 스스로 타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탈 재료와 산소그리고 발화될 만큼의 열이 있을 때에만 타오른다. 그래야 비로소 불꽃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조건들은 서로 의존하며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면 불은 곧 꺼진다. 


불이 꺼졌을 때 사람들은 묻는다. 그 불은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는 사라졌다하고 다른 누군가는 어디론가 이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질문 자체에는 불을 실체 있는 존재로 여기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실제로 불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 그저 조건이 모였을 때 잠시 나타났을 뿐이다. 조건이 흩어지면 그 현상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불꽃은 소멸된 것도 아니고 이동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사라질 이유가 생겼을 뿐이다.


열반은 어떤 고정된 존재가 죽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아니다. 또한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도 아니다. 불꽃이 꺼졌을 때처럼 욕망 집착 무지(탐진치)라는 요소들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반은 더 이상 타오를 조건이 남아 있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더는 반복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파도는 바다 위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파도는 바다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물의 움직임이 잠시 특정한형태를 이루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사라질 때 사람들은 그 변화 속에서 어떤 시작과 끝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파도는 새로운 물질이 생긴 것도 아니고 사라진다고 해서 무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파도는 단지 물의 일시적인 형상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하나의 종말로 열반을 완전한 소멸로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파도를 실체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생사와 윤회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언제나 동일한 흐름 즉 물이 있다. 


열반은 그 흐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는 상태인 것이다. 파도가 흐르는 물이든 생사 또한 본질의 전환일뿐이다. 열반은 그 전환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파도 형상의 의미를 구여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파도를 쫓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다를 본다. 


사람은 자면서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시간도 흐르고 사건도 일어나며 기쁨과 두려움 슬픔 같은 감정까지 생긴다. 의식은 그 모든 것을 현실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꿈에서 깨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 꿈은 어디로 간것인가? 하지만 꿈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꿈은 실체가 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꿈은 머릿속에서 일어난 것이고 깨어났다는 건 그것이 유지될 조건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남는 것은 꿈을 꿨다는 기억뿐이며 꿈 자체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존재냐 비존재냐 남았느냐 사라졌냐로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속의 사건을 현실의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열반은 어디론가 옮겨지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분별이 멈춘 지점인 것이다. 꿈 안에서 일어난 모든 감정과 사건은 더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얼음은 물이다. 그리고 물은 온도가 높아지면 수증기로 바뀐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달라지지만 그 성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다. 얼음이 녹으면 사라졌다고 말하기 쉽고 물이 증발하면 없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얼음도 물도 수중기도 모두 같은 물질이 다른 조건 속에서 형태만 바꾼 것이다. 


사람들은 한 존재가 죽어 사라지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물이 얼음이 되고 물이 증발해 보이지 않게 되는 과정을 소멸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바뀌는 것은 조건이며 그에 따라 드러나는 형태일 뿐이다. 


열반이란 건 어떤 변화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그 흐름 속에서 더는 특정한 형상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다. 그것은 어디로 간 것도 아니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조건이 모두 다했을 때 형태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 바탕만 남은 것이다. 


말이 닿는 곳엔 언제나 경계가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실에서 멀어진다. 생각이 머무는 곳엔 언제나 분별이 있다. 좋고 나쁨 있음과 없음 옳고 그름 그 모든 판단은 마음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뿐이다. 열반은 그 모든 경계를 건너는 일이다.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남은 것도 아니고 떠난 것도 아니다. 말할 수 없고 셈할 수 없고 잡을 수도 없다. 


그러니 질문 자체가 착각에서 비롯됐다고 한 것이다. 애초에 말로 닿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날 저녁 해는 서서히 사위어 가고 살라나무 두그루 아래 석가모니는 오른편으로 조용히 몸을 뉘었습니다. 
꽃잎이 흩날리는 고요 속에서 그는 마지막 숨을 내쉬고 말없이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그 침묵 속에서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무엇이 남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깨달은 그 순간이야말로 그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진짜 깨달음이었습니다. 


깨달음은 무언가를 새로 얻는 일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진실을 가려 온 안개를 걷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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