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표지그림입니다.

 

 

카를로 로벨리가 쓴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읽었습니다.

저자의 전작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어서 기대가 되었습니다.

책의 시작부분은 이론 물리학자들이 양자론을 생각해내게될때까지의 일화들을 보여주는데, 영화 오펜하이머가 떠올랐습니다.

 

양자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창. 

이 이론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양자론에 따르면,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사물의 속성이란, 그것이 다른 사물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반영일 뿐. 이러한 관점은 세계를 연속적인 것이 아닌, 입자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놀랍게도, 이 입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속성은 오로지 상호작용할 때만 발현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상호작용의 망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요? 양자론은 우리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관점을 버리고서는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재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배움을 추구하는 방식에도 적용됩니다.

배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양자론에서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진정한 배움이란,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발견한 것에 따라 자신의 정신적 틀을 재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확실성을 추구하지만, 진정한 지식은 확실성의 부재 속에서 성장합니다.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의심을 통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더 많이,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양자론과 배움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고, 상호작용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24년 첫번째 완독한 책입니다.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몇년전부터 가지고 있던 '일원론과 이원론은 공존할 수 있는가'에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대상의 속성은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을때만 드러난다.'는 생각은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작용되는것 같습니다.

 

다음은 책 내용중에 인상 깊었던 부분들입니다.

 

 

 

대상은 대상이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 자체로 존재한다. 전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대상, 아무것도 영향을 주지 않고, 빛을 방출하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 문단을 읽고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 요컨대 이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계는 연속적이지 않고 입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한下限이 있어서 사물이 무한히 작아질 수 없다.” “또한, 미래는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물리적 사물은 다른 물리적 사물에 대해서만 속성을 가질 뿐이며, 이러한 속성은 사물들이 상호작용할 때만 존재한다.” “서로 다른 관점을 나란히 놓으면 모순이 나타난다.”
     
    (삶의 문제들에도 이런것들이 있지않나. 한가지 사건에 서로 다른 관점이 있고, 모두 틀렸다고 말하기 힘든)



- 마흐는 “과학”은 모든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식은 오로지 ‘관찰 가능한 것’에만 근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뭔가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이것이 하이젠베르크가 헬골란트 섬에서 착상한 마법 같은 작업의 시작점에 있는 아이디어입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이 연구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에만 기초한 양자역학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마흐의 말을 거의 인용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에만 기초한 양자역학 이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주식의 전략도 이런 전제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 관찰 가능한 수치들 사이의 관계에 기초하여.)

     
    
- 인간이, 그의 정신이, 또는 인간이 사용하는 수數가 자연의 문법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숫자는 상징이고 지도일뿐 영토(실재)가 아니다.)

      
    
- 이 이론에서 특별한 ‘관찰자’는 아무런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더 단순합니다. 우리는 대상의 속성을 그 속성이 나타나기 위해 상호작용하는 상대 대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상의 모든 속성(변수)은 궁극적으로 다른 대상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것이죠. ‘맥락성contextuality’은 양자 물리학의 이러한 중심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기술적 명칭입니다. 즉, 사물은 맥락 속에 존재합니다. 모든 상호작용에서 벗어나 고립된 대상은 그 어떤 특정 상태도 갖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발현될 수 있는 일종의 확률적 성향이 그 대상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99 그러나 그것조차도 미래 현상에 대한 예상이나 과거 현상에 대한 반영일 뿐이며, 어떤 경우에도 항상 다른 대상에 상대적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격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세계가 속성을 지닌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100 저는 이것이 바로 양자론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관해 발견하게 된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이 책의 핵심내용.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나에게 나빴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확률은 있지만, 그 상대가 어떻느냐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상호 맥락성.)
    

    
- 우리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 즉, 기능(보고, 먹고, 숨 쉬고, 소화하는 등 생명에 기여하는 것)이 그 구조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러한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세라피와 연결, 가족이 떠올랐다. 사랑하기때문에 살수 있는것이다라는 말이 와닿는다.)  
    
      
    
- 다시 말해, 관련 정보라는 개념은 심적 세계의 의미와 물리학 사이의 사슬 전체는 아니지만, 첫 번째 고리이자 어려운 고리입니다. 의미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 전혀 없는 물리적 세계와, 의미와 의미가 있는 신호로 이루어진 문법이 있는 마음의 세계 사이를 잇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제 여기에 (뇌와, 의미를 갖는 과정인 뇌의 개념 조작 능력, 감정을 통합하고 다른 사람의 심적 과정과 관계 맺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 언어, 사회, 규범 등과 관계 맺는 능력 등) 우리를 특징 짓는 표현과 맥락들을 추가하면, 우리는 다양하고 더 완전한 의미 개념에 점점 더 가까운 무언가를 얻게 됩니다.


    

- PCM(투사적 의식 모델Projective Consciousness Model)131 가설에 따르면, 의식은 신체와 세계가 가변적이어서 계속적으로 변동하는 입력을 예측하려는 뇌의 활동입니다. 그리하여 표상을 만들어내고, 관찰된 불일치를 기반으로 예측의 오류를 부단히 최소화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과 연결되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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