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무의식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1917년에 쓴 글 치고는 1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시간적 거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 내 책장에서 꺼낼때만해도 어려울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생각보다 친절한 책이었다.
융 형이 글 솜씨가 있는것 같다.
낯선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아서 읽는동안 흥미가 계속 유지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자신의 인격 전체를 소유한다는 건 유익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억압된 욕망이 가장 심각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가장 취약한 바로 그 지점에서 솟아나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편이 훨씬 낫다. 어려움을 환상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내면의 어려움을 현실적 어려움으로 변환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러면 적어도 그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무의미한 투쟁으로 자기 자신을 소진 시키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어둡고 비루한 측면을 인식하도록 교육받는다면, 그들은 동료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 또한 배우게 될 것이다.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의 증대와 위선의 감소는 이웃을 향한 너그러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본성에 가하는 폭력과 멸시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연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의 겁 많고, 사소하고, 평범한 모든 부분은 이런 가능성을 대하면 움츠러들 것이고, 그것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감탄스러운 수단이 하나 존재한다. 우리 내면의 그 다른 측면을 ‘다른 사람’ - 경멸스럽고 불쾌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욕구하는 동료 인간-에서 찾으면 되는 것이다. 골치 아픈 유령은 이렇게 포획되며, 당사자는 만족스럽게 그 사람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나갈 수 있게 된다.
심리적 비자아와 심리적 자아를 구분해내려면, 인간은 반드시 그 자신의 자아 기능에 확고히 발 딛고 서야 한다. 즉 그는 모든 측면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인간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삶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완전히 충족시켜야 한다.
무언가를 경험할 때 나는 단지 그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의식이 위험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건, 개인이 그 무의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뿐이다.
잠재의식은 오직 의식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모든 심리 현상은 에너지의 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에너지는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에서의 욕망(desire) 자체인데, 나는 것을 성적 의미로 국한되지 않던 본래의 용법에 따라 리비도(libido)라고 부른다.
편집증 환자들은 경험이 드러내주는 명백한 모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망상적 개념을 전체 우주에다 강제로 강요하려 든다. 또한, 자신만의 병적 이론 체계와 조화되도록 모든 것으로 해석하고, 아들러의 말대로, ‘배열’하는 방법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
이들이 우주의 모든 혼돈을 잘 정돈된 틀-그들의 주관적 가치에 복종하는 정신의 창조물-에 끼워 맞추고자하는 절실한 욕구에 내몰리기 때문이다.
보링거는 “미적 향유란 ‘대상’에 투사된 자기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와 같은 공식은 우리의 ‘전이’ 개념과 완벽히 일치한다.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지각되지 않은 심리적 사건들의 총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은 활동의 위해 필요한 강도가 결여되어 있어 의식과 무의식 간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모든 심리적 사건을 포함한다.
편집증 환자가 외부의 모든 비판에 맞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느끼는 건 그의 망상적 의식 체계가 내면에서 끊임없이 비판당하기 때문이다.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