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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의 어떤 영상을 우연히 보고 난 후 읽게 된 책이다.
https://youtu.be/8qcQx1FzWZ8?si=a_YDjQAnYSgivfBh
이 영상에서는 레버리지에 대한 통찰이 멋있었다.
'앎'이 레버리지의 지렛대에서 받침대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말이 특히 와닿았다.
저자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96학번 선배였다.
이 책에서는 시크릿과 비슷한 내용이 있지만 불교와 융합하여 저자 나름의 철학으로 만든듯하다.
불교의 연기설이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이야기에서 제임스 알렌의 '생각하는대로'와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와 '퓨처셀프',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 '원씽', '호오포노포노'가 떠올랐다.
'내면소통'에 나오는 배경자아와 비슷한 내용을 설명한 부분도 있어서 쉽게 이해가 되었다.
위의 유튜브 영상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미래에 되고싶은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게 당연히 올 나의 미래라고 알고(지렛대의 받침인 '앎'!) 현재를 살아가야 그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내용이 좋았다.
사람들마다 '앎'의 종류와 깊이가 다를것이다.
나의 레버리지를 위한 나만의 '앎'을 찾아가야겠다.
내 앞의 김치찌개는 실체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속 생각일 뿐입니다.
내가 김치찌개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생각을 보고 있는 겁니다.
내 앞에 김치찌개가 있다는 그 생각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심상입니다.
세상은 마음속 이미지일 뿐입니다.
내 마음속 세상을 우리는 매 순간 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내 마음속 이미지라면, 내가 보는 이 세상은 내 마음속 공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 공간을 매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것을 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볼 뿐입니다.
우리 생각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생각이 현실을 만들고, 마음이 만물을 만드는 이유입니다.
사고가 사물을 만드는 진실은 이미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세상의 진리였습니다.
세상은 심상이 드러난 것입니다. 내 마음속 세상을 나의 눈이 관찰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투사가 현실의 인지를 만드는 것이죠.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우주인 이유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세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심상과 물상은 같은 것입니다. 물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허용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용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존재의 실상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공에 불과한 세상에 대한 집착을 용서하는 겁니다.
그 진리를 나의 앎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사랑인 겁니다.
쉽게 말해 현실에 드러나는 삶의 모든 과정을 인정하고 허용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삶에 나타나는 기쁨, 슬픔, 고통, 불만의 희로애락을 품에 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희로애락의 흐름을 허용하는 겁니다.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불안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기쁨을 잡으려 하지 않고,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흘러가게 아이의 자리를 허용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 무의식에 새겨진 타인의 이미지를 펼쳐냅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날 때, 그가 아닌 그의 이미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나에게 남겨진 이미지와 바이브를 보는 겁니다.
눈 앞에 그를 보지 못하고, 마음속 그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색즉시공의 진실은 하나입니다.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환영이고 비어 있으며, 일시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실체가 없는 그 무엇에 갇혀서 허우적대지 마십시오.
그냥 드러난 세상을 바라보며 그것을 즐기면 그만인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눈에는 모든 것이 평화롭습니다.
바라는 즐거움이 아닌, 흘러가는 여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을 움켜쥔다고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움켜쥔 손을 서서히 풀어나갈 때 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손을 간질거리는 대자연의 연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집착을 벗어나 다른 곳을 바라보세요.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을 접할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이 떠오르네요.
“고개를 돌리니 피안이네.”
신생아는 좋은 느낌, 굿 바이브를 간직한 채 매일매일, 매 순간 자신과 세상을 동일시한다.
하루에도 400~500번 이상 동일시가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의 즐거움이 웃음으로 드러난다.
세상이 나임을 알고, 세상과 나는 연결되어 있다는 축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i am that I am 세상’인 것이다.
인식이 존재를 부르는 것은 다양한 가능태의 우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그 가능태를 현실이라는 ‘지금 여기에’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능태의 미래를 인식을 통해 현실태(현실의 궤도, 현실의 과정)의 오늘에 연결시키는 과정입니다.
세상은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하는 자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이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할 것은 하나입니다. 인식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가능태를 인지하고, 그것을 인식하여 과거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허용입니다. 현실의 모습을 허용하고, 변화를 인지해보십시오.
그 작은 변화의 인식이 새로운 가능태와 연결될 것입니다.
인지하고, 허용하고, 인식하십시오.
곧 여러분이 원하는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겁니다.
나의 존재감을 타인과의 분리감을 통해 찾으려고 합니다.
시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십시오.
그 착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십시오.
여기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현행훈종자’라고 표현했습니다.
현재의 행위가 종자로 전달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우주라 불리는 전체의 티끌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우주와 분리된 개체로 보며 살아가지만 그건 시각적 착각일 뿐입니다. 이런 착각이 인간을 고통의 감옥에 빠뜨립니다. 이 비좁은 감옥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를 연민의 감정으로 껴안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완전한 경지에 이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비좁은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만으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결과가 원인을 바꾸려고 하니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원인이 결과를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두렵습니다.
있는 것은 없어지고 높아지면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집착 없이, 주어진 삶을 허용하고, 지금 여기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며 지낼 수 없습니다.
현상은 허용하는 것이지 판단하고 간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크릿은 아이의 인식이 존재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 존재는 나의 허용을 통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펼쳐지는 과정이 현상으로 보여집니다.
삶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허용하고 변화를 인지하는 것이 나의 역할입니다.
그 허용을 통해 아이의 인식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는 하게끔 되어 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진리는 내가 하는 게 아님을 아는 것이다.
삶은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라 연기에 따라 펼쳐진다.
나와 너, 나와 세상의 관념의 연동이 연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무의식적 관념에 참여하고 있다.
세상이 나의 관념으로만 펼쳐지는 게 아니다.
삶이 복잡한 이유다.
여러분의 과거, 현재, 미래는 지금 여기에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과정으로 완벽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현재는 과정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과거와 미래는 그 과정과 연결된 원인이고 결과입니다.
원인이 있으면 과정이 있어야 하고,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습니다.
지금의 과정을 허용하고 오늘을 받아들일 때, 결과와 원인도 허용하게 됩니다.
그 흐름 속에 여러분의 미래가 펼쳐집니다.
부자는 돈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부는 느낌입니다.
부자는 부자의 느낌이 드러난 것입니다.
부의 느낌이 내 주변을 감쌀 때, 나의 세상은 부자의 삶으로 펼쳐집니다.
미래에 펼쳐지는 삶의 과정이 지금이었음을 알 때, 그 느낌이 바이브입니다.
결과에서 펼쳐지는 과거가 지금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과의 바이브를 지니고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미래를 당겨 현재를 사는 방법입니다.
바이브가 좋으면 우리는 그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나에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람과 시간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나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나는 내 안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이 나라는 기준을 통해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실’의 세상이 아닌 ‘식’의 세상입니다.
우리의 인식이 세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관념, 즉 스스로에 대한 규정은 하나의 생각으로 드러납니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은 삶의 변화로 연결됩니다.
이때 우리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바뀔 때 주변의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행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여행이 제공하는 낯선 풍경의 경험을 통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다양한 감정들과 마주하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여행에서 발견하게 되는 낯선 마주침은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확장시켜주는 지혜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여행이 낯선 풍경을 체험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여행이 아닌 관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여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부(否)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이 사태는 인간의 삶의 적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이 경험칙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세상은 아이의 인식을 내가 관찰하는 공간입니다.
아이의 인식을 허용하고, 주변의 변화를 인지할 때 세상은 바뀌게 됩니다.
나의 노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삶은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세상은 아이에 의해 저절로 펼쳐지는 곳입니다.
나는 단지 그 변화를 관찰하고, 지금의 모습을 허용하는 관찰자입니다.
굿 바이브를 간직한 채, 현실 창조를 하면서, 영성에 집착하지 말고, 삶의 변화를 인지해보세요.
오늘을 허용해보세요.
어느 순간 여러분의 삶은 바뀌어 있습니다.
이미 바뀐 모습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즐거운 여정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아이의 직관이 나의 내면이 되어 삶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나와 세상은 아이의 의식 공간입니다. 그 배경은 늘 세상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지와 함께 바이브도 동반됩니다.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라는 환영 속에는 생각, 감정, 느낌이 항상 공존합니다. 생각, 감정, 느낌 없이 보내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에, 그 느낌에, 그 감정에 아이는 물들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펼쳐지는 공간으로만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는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가 펼쳐지는 영상에 백스크린은 물들지 않습니다.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나(I)는 다릅니다. 나는 생각에 집착합니다. 나는 감정에 끄달리고, 느낌에 빠져듭니다. 나는 생각, 감정, 느낌과 하나가 됩니다. 그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것과의 동일시를 통해 나를 확인합니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다.그렇기에 나는 부자가 되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으며, 좋은 기분으로 오늘을 보내고 싶습니다. 모두의 바람입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삶은 그렇게 잘 펼쳐지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룬 삶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이룬 모습도, 또 다른 욕망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고, 삶은 늘 과정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1억 부자는 10억 부자의 과정일 뿐이고, 10억 부자는 20억 부자의 과정으로만 존재합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에고의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욕망은 소유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욕망은 허용으로 채워집니다.
삶을 허용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욕망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허용할 때 삶의 갈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지금의 이 모습보다 내일의 저 모습이 좋습니다. 내일의 저 모습보다는 미래의 그 모습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여기보다는 저기, 저기보다는 거기가 좋습니다. 오늘보다는 미래가 좋아 보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똑같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에 쌓여 있나요? 그 모습을 알고 알아주세요. 그리고 미움에 빠진 자신을 느껴보세요. 온전히 그 감정에 빠져 미움의 시간을 보내보세요. 외면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고, 없애려 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완전히 느껴보세요.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를 미워하는 감정과 하나가 되어보세요. 그리고 그곳에 머물러보세요. 신기하게도 그 미움의 감정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사는 게 두렵고 불안한가요? 그렇다면 그 불안과 하나가 되어 불안해보세요. 불안이 사라지도록 노력하지도 말고, 불안이 다가올 때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껴보세요. 아, 이게 불안이구나. 나는 지금 불안의 감정과 동일시되어 있구나. 완벽하게 불안을 허용해보세요. 나에게 펼쳐지는 생각, 감정, 느낌을 없애려 하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보시길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를 있는 그대로를 느껴보세요. 어느 순간 미움과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곳에 또 다른 생각, 감정, 느낌이 채워집니다. 아이의 자리는 늘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생각, 감정, 느낌에 물들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에 빠지고, 불안한 감정에 휩싸이며, 안 좋은 느낌에 매달려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아이는 물들지 않습니다. 나는 부와 행복과 욕망에 집착하지만, 아이는 거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격랑의 자리에는 늘 고요가 있었습니다. 내 마음이 불안에 떨고, 미움에 몸부림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도 아이의 자리는 고요합니다. 그 자리는 태풍이 지나가도 늘 그 상태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떤 격랑에도 물들지 않는 고요의 자리, 아이(i)는 늘 우리(I)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즐거움도 슬픔도 늘 그 자리를 지나갈 뿐입니다. 삶의 희로애락은 아이의 자리에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펼쳐집니다. 그 자리를 알고, 인생을 엮어나갈 때 우리는 생로병사에 물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유로워집니다.
나와 아이가 있음을 알고 내가 아이임을 아는 것.
아이의 인식이 세상에 펼쳐지고 나는 인식의 대상이라는 것.
나는 무아고 세상은 연기라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 깨달음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더 나은 저곳을 위해 공부하지만, 초라한 이곳이 완전함을 아는 게 전부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면서 삶이 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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