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간 (2024.11.08~2024.12.10)
관계, 결핍, 꿈, 느린 시간, 순간, 균형, 실끊기
7가지 주제로 인생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는 책이다.
도선사를 일하고 있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문장이 쉽지 않아 읽는데 한달 넘게 걸렸다.
중간중간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서 더 천천히 읽은것 같다.
별점은 3.5/5
인상 깊었던 문장을 6개만 뽑아보았다.
갈증을 모르는 사람은 물의 가치를 모른다. 결핍만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 비참해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는 그것의 결핍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극복될 수 있는 결핍은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타인이 내게 내어주는 시간은 언제나 소중한 선물이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일 수 있듯, 많은 것이 적은 것일 수도 있다.
뽑은 문장들을 보니 이 독서에서 나는 결핍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것 같다.
화려하게 꾸며진 문화적 허식, 외적 규칙과 규범, 기술과 사회적 형태를 벗겨내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같은 동기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인내와 상식, 경청하는 능력뿐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점을 어디에 두든, 눈길은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해야 한다.
작은 것은 큰 것을 비추고 인간은 섬이 아니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다.
삶의 비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일 뿐이다.
삶의 의미는 지속 가능하고 중립적이며 자유롭다. 삶의 의미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한 후, 우리 자신을 주위의 모든 것과 연결하는 실에 대한 긴 에세이를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가는 실들이 모여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만든다.
그 촘촘한 관계망 안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거대한 합창단을 이루며,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 작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런 실타래가 바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모든 것들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물건은 관계 형성을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물건의 가치는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잠재력에 있다.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근원이란 음식을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환대의 개념은 주는 행위보다 받는 행위에 대한 비중이 더 크다.
받는다는 행위에는 겸손과 감사의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큰 도전이다.
귀찮은 의무가 없고 권리뿐인 개인으로 사는 것이 재미있고 자극적일 수 있지만 이는 순풍이 불 때만 유효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존중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어른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삐걱거리는 경첩으로 현재를 인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은 어떤지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의존하지만 어른도 아이들에게 의존한다.
아이들로 인해 어른은 삶의 취약성과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권리와 의무가 가득 찬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배우자, 자녀, 부모 등 다른 사람과 함께 살 때는 항상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용서와 겸손, 감사의 능력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인간관계에서 받는 만족감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최신 인공지능의 발전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있다.
사회적 연대 안에서 이런 강렬한 유대감을 느끼고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보지 못한 개인의 삶이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가장 두꺼운 실 즉 가장 가까운 타인, 의미 있는 타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를 당할 때 가장 취약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존재감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반면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비방을 당하고 경멸의 시선을 받는 건 그리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좋든 나쁘든 타인과 연결하는 실은 중요하다. 그 실이 보이지 않는 순간 인간은 완벽한 혼자가 된다. 삶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고 다른 어떤 생명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삶을 끝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순간이다.
보통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식해야만 타인에게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사람들이 당신을 키우고 지원하고 작은 호의와 오랜 우정을 베풀고 절망이나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구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와 겸손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가르칠 수 있고 깊은 뜻을 배울 수도 있다.
내가 탐색한 모든 관계는 동경과 갈망, 결핍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각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차이는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가 빠진 것이 생기면 감정이 고조되면서 관계가 불완전해진다. 결핍이 인생의 두 번째 의미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갈증을 모르는 사람은 물의 가치를 모른다. 결핍만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즉시 얻으면 필요한 것을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수익률 감소의 법칙에 따라 모든 혜택은 허공으로 증발한다.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으려면 갈망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는 데 개인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잘못된 믿음 탓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고질적인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습관이 나와 내 주변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곧 당신의 관계다. 나와 연결된 사람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술을 끊겠다는 내 개인의 결심은 별 효용이 없다. 습관은 고무줄에 연결된 공처럼 다시 딸려온다. 인간은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지해야 한다.
베이트슨은 우리 문화에서 개인의 의지력과 선택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보고, 전체에 의해 개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려준다. 음주 문제는 나 자신, 술병, 공간, 주변 사람들 등 내 삶의 관계와 밀접하다. 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사회와 문화의 주변 시스템이 알코올 중독인 것이다. 베이트슨은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술을 끊으려면 우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 나 자신이 아니라 더 큰 무언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는 ‘더 큰 무언가’를 보통 신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베이트슨은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 개념이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는 데는 도움이 될 거라고 인정했다.
아름다운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면 비참해진다.
돈은 세상을 돌아가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인류를 한데 묶는 데 있다. 또한 돈은 실용적인 지불 수단이자 교환의 매개체다. 유일한 문제는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일에 기여하기 전까지 대체로 공허하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돈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기도 하지만 부채나 불평등, 시기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돈이 사회 영역에 침투하면 신뢰와 공동체는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리운 건 사람뿐이었다. 현장에서 내가 가장 원했던 건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리워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정서적 만족감에 대한 것이었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에 관한 책에서 말했듯이, 휴가의 의미는 멋진 휴가를 기대하는 것과 휴가에서 얻은 추억을 공유하는 것 두 가지에 있다. 그에 따르면 휴가 자체는 결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울창한 열대 낙원, 번화한 대도시, 산속 휴양지 그 어디를 가든 나와 관계하는 것들로부터 떨어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내가 만났던 한 원로 작가는 평생을 모리셔스에서 보내며 바다에 관한 시로 명성을 얻었다. 어느 날 지역 신문의 기자가 그를 해변 레스토랑의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해변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왜 작가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바다를 보지 않으시죠?” 기자가 물었다. 그가 답했다. “바다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에게 물리적인 바다는 중요치 않았다. 그것은 은유의 원천이자 상상의 도화선이었다. 그는 수평선 너머 존재하는 욕망과 결핍, 갈망을 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부르고 물질에 무감동해진 사람들이 결핍도 일종의 축복이라며 가난한 이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이 없는 일이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과 필요한 것 이상이 필요한 것은 다른 얘기다.
그들에게 있어 자본주의에게 착취당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자본주의에게 외면당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저항과 결핍을 수반하는 행위였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저항이 필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는 그것의 결핍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타인의 인정은 일종의 결핍이다.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인간에게 가장 결핍된 요소일지 모른다.
선택이라는 행위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삶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고통이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의 삶에서는 선택이랄 게 없다.
삶의 유일한 바람은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빈민에게 지금의 삶이 적극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들은 매우 기분이 상할 것이다.
잘못된 결정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려면, 그 결정의 대안이 현실적인 동시에 매혹적이어야 한다.
인간은 절대 혼자가 아니며 따라서 인간의 선택과 결정은 모두 다른 사람,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소원이 있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소원이 있고, 자유인에게는 여러 가지 소원이 있지만 죄수는 하나의 소원에 만족한다.
바라던 모든 것을 가진 자는 순간 가난한 자가 되어버린다.
에밀 뒤르켐은 국민에게 권리와 혜택을 부여하는 것은 쉽지만 이후에 이를 철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부유한 사람들의 소비를 줄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결핍은 삶의 방향성과 집중도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결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삶에 윤활유가 되는 마찰과 저항을 야기한다는 점일 것이다. 마찰과 저항으로 인해 당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에 전력을 다하게 되고, 극도로 어렵지만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성취로 이어진다. 희망이 없으면 저항도 있을 수 없다. 희망은 꿈에서 자란다. 이것이 꿈이 인생의 세 번째 의미인 이유다.
극복될 수 있는 결핍은 삶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오아시스가 멋진 이유는 그 주변이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물과 나무가 풍부했다면 오아시스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결핍은 대조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대조는 인간에게 의미를 갖는다.
혼자 걷는 것은 관계의 실을 강화하고 회복시키며 새로운 실을 생성한다.
타인이 내게 내어주는 시간은 언제나 소중한 선물이다.
《종의 기원》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모든 생물은 다른 모든 생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알린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달려 있다.
미래와 과거가 연결된 경첩이 부서지면, 남는 것은 미친 듯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뿐이다.
마음에서 파낼 수 있는 인상과 지식의 조각이 많을수록, 맨 아래 서랍에 숨겨져 있거나 먼지가 많은 구석에 있다 해도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조각들이 많을수록,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을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많은 세상이 우리를 소유한다.
나를 연결하는 기억의 실들이 많을수록 당신은 주변 환경과 더 조화롭게 살 수 있다.
라곰(스웨덴어로 현재에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이르는 말―옮긴이)나 삶의 질이 아닌 ‘지금 여기’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라는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디지털 삶에 익숙한 중산층이 결국 카프카스(러시아 남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산악 지역의 총칭―옮긴이)에 사는 신화 속 인물들처럼 변신할 위험이 있다. 그들은 순간을 사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매일 아침 침대를 팔았다가 밤에는 다시 사러 뛰어나갈 정도였다.
이 집안에는 수치심과 침묵이 묵직하게 존재했다.
“무언가와 연결되는 실을 통해 마지막으로 놀라움을 느낀 때가 언제입니까?”
이런 지적인 놀라움을 겪다 보면 답을 찾는 것보다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득하다.
인생의 의미는 행복과 다르다.
의미 있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일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이 때로는 방향성 없고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공허한 삶일 수도 있으니까.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은 균형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특히 그렇다. 데이터는 0과 1로만 구성되고 그 안엔 의미가 없다.
데이터는 통계나 언어로 옮겨질 때 정보가 되고 정보는 더 큰 맥락에 놓일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그제야 데이터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즉 FOMOfear of missing out는 유행성 문명병이 되었다. 이 병은 집중력을 약화시키고 판단 능력을 둔화시키며 진보나 안정이 아니라 퇴행을 불러온다. 윤리가 중요한 의제였던 후기 고대 사회에서 삶에 중요치 않은 것들을 뜻하는 아디아포라라는 용어가 있었다. 기독교인과 스토아학파에게 이 단어는 삶에 진지한 사람이라면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나타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사로운 것들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몰두하는 걸까?
스포츠카는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처럼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쉽게 해독할 수 있고 가독성 높은 기호다. 물론 공작이 되고 싶은 마음은 잘못이 없다. 그 마음이 전부가 아닌 한.
모두가 ‘진실, 모두 진실, 오로지 진실’을 외치며 순도 100%의 진실에만 집착한다면, 세상은 오해를 사기 쉬운 일로 넘칠 것이다. 무엇이든 100%는 힘들다.
현대 서양 철학에서 이성의 등불로 불리는 칸트는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거듭 말하지만 어차피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모든 가능성 중에서 어떤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가다.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괜찮은 인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필터를 정기적으로 청소하여 쭉정이를 계속 솎아내야 한다. 균형과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정신병동에 입원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거짓말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몽테뉴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과 진실 사이의 회색 영역을 무시했다. 정직에는 여러 가지 맛이 있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일 수 있듯, 많은 것이 적은 것일 수도 있다.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시간을 놓쳐서는 안 되며,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남겨진 사람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인으로 인해 끊어진 실들이 만든 공백 때문이다.
작은 세상은 큰 세상을 투영하고 큰 세상에 말을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
공동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자신이 일부인 더 큰 이야기를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자신의 작은 정원만 가꾸며 사는 사람들 말이다.
“고통 없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탐구가 없는 삶은 시간 낭비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친구의 딸은 10대 후반에 암에 걸렸고, 몇 차례의 치료 끝에 2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는 삶에 항의하지 않았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고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후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아이는 빨리 성장해야 했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때가 되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겹겹이 시체가 묻힌 묘지 아래 풀이 우거진 언덕에 앉아 공상에 잠길 수도 있어야 한다. 세상은 다채롭고 가능성이 풍부한 멋진 곳이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내려놓아야 할 때도 분명 있다. 세상은 당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지만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세월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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